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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부루스 (feat. 수세미)

이제 주부 3년차로 좀 실력이 늘었다 싶은 부분 두 가지.
1. 보이는 것과 숨길 것을 구분하고 적절히 배치하는 것
2. 주방 살림은 '건'과 '습' 두 가지만 알면 된다는 것
물에 담가 둬야지만 되는 일들이 있고, 모든 물기가 완전히 말라야만 되는 일들이 있는데, 이게 주방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상과 활동의 전부다. 제대로 안 지켜지면 살림하는 당사자만 힘들어지므로 되도록 주의점이나 노하우를 잘 지키려고 한다. (건과 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 포스팅에서 제대로 해 보겠다)

그 노하우 중 한가지가 수세미 관리인데, 나는 수세미 유목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가지 타입에 정착하지 못했다. 미국 마트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있는 스카치 초록 수세미는 너무 빳빳해서 사용감이 좋지 않았다. 일회용 페이퍼타올형 수세미는 왠지 환경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졌고, 너무 얇아 제대로 닦이는 느낌이 들지 않아 세제를 더 자주 펌핑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그물망형 수세미는 잘 마른다는 장점이 있지만 흐물흐물해서 나와는 맞지 않았고, 그나마 나에게 잘 맞는 손뜨개형은 잘잘한 음식물 찌꺼기가 쉽게 끼었다. 게다가 설거지 후 축축한 상태에서 수세미받침에 올려두면 건조가 잘 되지 않아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다. 수세미를 자주 살균하는 만큼 금방 상해서 갈아치운 것만 수십개다. 그래서 발견한 나만의 꿀팁,은 마지막 부분에 말씀 드리겠다.

왜 멀쩡한 식기세척기를 놔두고 수세미에 그리 집착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래 그랬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미국에 시집와서 가장 좋은 것이 식기 세척기와 싱크대 속에 설치된 음식물 분쇄기였을 정도로 설거지는 전적으로 기계에게 맡겼던 나였다. 많은 양의 그릇들도 10분만에 대강 헹궈서 넣어두면 알아서 설거지를 해주고, 끝난 후에 열어보면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빵처럼 그릇들이 뽀얗게 되어 나오는 모습이 어찌나 흡족하던지. 하지만 우리 엠마를 임신하고 부터는 세척기가 설거지를 해주는 것이 영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일이 다시 손으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집 수세미는 마치 전문 발레리나의 토슈즈처럼 빨리 닳고 빨리 교체되었다.

설거지를 직접 하다니, 너무 힘들고 번거롭지 않냐고? 그래도 덕분에 나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되었다. 기뻐할 일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이면 잘 하게 되는 것이 이득인 것이다.

설거지는 깨끗한 것에서 기름기가 많거나 양념이 많이 눌러 붙은 것 순으로 한다. 제일 마지막은 무조건 생고기나 생선을 손질한 도마와 칼이다. 깨끗한 것들 중 가장 처음은 깨지기 쉬운 것들, 이를테면 유리컵이나 와인잔 같은 종류이다. 와인잔은 뜨거운 물로 잘 헹궈서 빳빳한 린넨 수건에 엎어놨다가 몇 분 후 원래대로 세워서 말린다. 식기 세척기에 엎어놓고 말렸다가 와인잔의 스템부분이 두동강 나는 참사를 겪고 깨달은 방법이다.

또한 1차(애벌) 설거지를 하며 그릇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면 효율성이 더 높아진다. 사기그릇은 사기그릇대로 쌓고, 평평한 접시, 스텐 냄비류, 수저, 칼이나 국자 등의 조리 도구 등을 내가 보기 편한대로 분류하여 쌓아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2차(본격) 설거지를 할 때 뇌를 덜 써도 되는 자동운전 모드가 되어 편하다.

나에게 애벌 설거지란, 보기 싫은 음식물 찌꺼기들만 헹궈내며 그릇들을 분류하는 단계를 말한다. -나의 꿀팁 시작- 이 때 일회용 수세미 한 장을 오분의 일로 자른 것을 이용한다.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나의 편의와 정신건강을 고려한 나름의 묘책이다. 애벌 설거지가 끝났을 때 쯤에는 이 작은 수세미 조각이 아주 너덜너덜, 시뻘개져 있는데(찌개류나 토마토 파스타같은 것을 먹은 날이면 더더욱) 마지막으로 생고기를 손질한 도마나 칼을 닦거나 가스레인지 스토브까지 닦는데까지 이용하면 그제서야 죄책감 없이 버릴 수 있다.

본격 설거지는 뜨개질 실로 만든 수세미로 한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세제 펌핑만으로 풍성한 거품이 생성/유지되기에 나름대로 오랫동안 그릇을 닦을 수 있어 좋다. 이 단계에서 나의 뇌는 거의 휴식모드에 들어가는데, 이미 그릇들이 분류되어 있고 거의 깨끗한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다. 설거지를 하며 의식의 흐름에 따른 여러가지 잡 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그게 나는 참 좋다. 단상들을 설거지 후 메모해 두었다가 일기나 에세이로 발전시키면 설거지 외에도 소득이 있는 셈인 것이다.

설거지 후에는 수세미를 공중에 '걸어서' 말린다. 전에는 싱크대 안쪽에 붙이는 수세미 철제 홀더를 썼었는데, 자꾸 물때가 끼고 잘 마르지 않아 고민이었다. 그런데 싱크장 위 캐비넷, 그러니까 상부장 밑에 봉을 달아서 그 봉에 S자 후크를 달고 손뜨개 수세미를 걸어두니 잘 말라서 좋았다. 건과 습이 얼마나 주방 일에 중요한 개념인지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