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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며 한 설거지가 나의 우울감을 키웠을까


전업주부인 내 모습에서 울엄마를 보다

살림을 하다 보면,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많은 것 같은데 집안 상태는 늘 제자리인 것만 같은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일을 잘 못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살림이란 게 원래 이런 건지 한숨만 나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집의 가사를 책임지는 안주인이 아니라 그저 비효율적인 노동자(?)일 뿐인 것 같아서 자존감은 떨어지고요.

이런 날들이 계속 되고 한국에 대한 향수까지 깊어지자, 저는 어느 순간 하루 종일 한국 티브이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에 말 못하는 아기랑 둘이 12시간을 보내면서 사람이, 그리고 고향의 소리가 그리웠거든요.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설거지 하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요. '엄마는 저 드라마 시작하기만 기다리셨는데 왜 티브이 앞에 앉아서 안 보시고 이것 저것 집안일 하면서 듣기만 하실까?' 그리고는 설상가상으로 엄마를 놀리기까지 합니다. "엄마 또 그런다~! 크크큭 앉아서 드라마 좀 제대로 봐!" 결혼 후의 저는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개며 드라마를 '들으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현재 제 모습과 오버랩 되며 조금 슬펐더랬지요.

TV만 보는 건 사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엄마는 티브이 앞에 '앉아서' 그것만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내가 손을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그저 드라마 보는데 시간을 흘려 보낼 수가 없으셨던 날들이 쌓이고 쌓여 , '앉아서' 티브이를 보면 맘이 편치 않은 사람이 되셨던 겁니다.

반대로 저는 집안일이 '단순노동'이라는 생각에 그 시간이 아까워서 드라마라도 봐야 내 시간이 덜 아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설거지+드라마 보기, 요리+한국 티브이쇼 보기가 세트인거죠. 결혼 전, 한국에서 살 때는 괜찮은 미드 몇 편 몰아보기만 했지 한국 드라마는 전혀 안 보던 저였는데 지금은 '한드' 광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한국이 그리워서 틀어놓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신상 드라마를 챙겨보는 수준에 이르렀죠. (집에서 매일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는 제가 요일을 알 수 있는 건 드라마 때문이었..)

미드는 영어 자막을 봐야 하기 때문에 설거지 할 때 틀어 놓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영화는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해서 봐야 하고 너무 길어서 패스. 넷플릭스에 보고싶은 미드와 영화가 많은데 저에겐 그래서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아요. 밤엔 책 읽다가 뻗습니다. 볼 드라마가 없으면 (저의 최애 예능 프로그램인) 맛있는 녀석들, 생생정보, 밥 블레스유, 한국기행, 실제상황 같은 한국 정서 가득한 쇼를 보면서 잠시 여기가 한국인 것같은 기분에 빠지기도 하고요.

살림 효능감, 그리고 자신감 저하의 원인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는 18개월이 되었고 (18개월동안 드라마를 보았고), 살림은 해도 해도 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은 늘 별로였고요.
'분명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살림 효능감은 왜 이렇게 낮지?' 하는 생각에 자신감은 떨어지고 내가 우리집을 '관리'한다는 생각보다는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꾸역꾸역 '해치운다'는 생각이 더 커져 모든 게 다 귀찮아졌습니다. 애기엄마라 잠은 늘 부족하고, 가족 친구 한국은 그립고, 시카고의 겨울은 길고.. 경미한 우울증이 안 올 리가 없었죠.

어느 날엔가 스트레스 레벨이 높아 머리가 아파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만 틀어놓고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요리가 즐거운 거예요. 신선한 재료들을 깨끗이 손질하고, 집중해서 썰고(ASMR못지않은 경쾌한 소리), 시간과 강약에 맞춰 열을 가해 조리하고 맛보고.. 내가 차려야 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결과물도 좋았고, 잊고 있던 요리의 즐거움까지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티브이를 보면서 살림을 했던 것이 저를 힘들게 했다는 건가요? 그건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게 그나마 저를 지탱해 주었다고 믿었거든요. 한국에서의 나름 화려했던 나를 잊어버리고 미국에서 사는 전업주부로서 무너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설거지 할 때 나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

뇌 과학자들은 기상 직후, 샤워할 때 등 머리를 쓰지 않고 '자동 모드'로 움직일 때 뇌에서 세타파가 나온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유명한 You Raise Me Up이란 음악의 작곡가는 샤워하다가 악상이 떠올랐다고 하죠. 저는 이 현상이 설거지 할 때도 생기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티브이를 틀어놓지 않고 설거지에만 집중하면 왠지 모르게 글감들이 많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침잠해 있던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서 그 단상들을 메모하고, 글쓰기로 정리해두었던 적이 꽤 있었어요. 흡족한 경험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거지만 집중해서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결혼 전까지 독립하지 않고(못하고) 다섯 식구와 평생을 살았던 저는 24시간 중 절반을 복작거리는 소리 없이 지내는 게 어색하고 외로웠나 봅니다. 결혼 전에는 너무나도 원했던 게 나만의 주방,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결혼 초반에는 분위기 있는 재즈음악이나 최신 팝 등을 틀어놓고 나름 즐기는 수준으로 그 적막감을 해결하려 했는데 그게 만성적 한국 티브이 시청으로 이어진 거죠.

살림을 명상하듯 할 수 있다면

한때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이 저한테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그저 생각 없이 흡입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혀로 맛과 질감을 세세하게 느끼고, 잘 씹은 후에 삼키는 겁니다. 그러면 과식을 방지할 수 있고 영양 흡수적 측면에서도 더 좋다더군요. 유명인사들이나 세계적인 지성인, 부자들이 거의 모든 것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명상의 기초는 오감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해요. 눈을 감고 지금 들리는 소리, 촉감, 맛, 냄새 등에만 채널을 맞추는 거예요. 눈을 뜨고서는 특정 색, 예를 들면 파랑색을 갖고 있는 모든 사물을 하나하나 응시해 본다던가.. 현존하는 내가 잡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체험하는 거죠.

살림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생 자체가 수행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스님처럼 귀한 손님께 공양하듯 요리를 하고, 마치 처음 먹어본 음식처럼 감사히 먹고, 명상하듯 집중해서 설거지를 하고.. 비록 밭을 일궈 농작물을 직접 얻을 수는 없어도 내가 몸을 직접 움직여야지만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체득하고 성장하면서요.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우울감도 해소되고 살림 효능감은 높아지지 않을까요? 전 아직 부부의 세계 마지막 두 편을 봐야 합니다만.